[제 17회 중랑문학상 대상] 갈잎을 둘러쓰고 있는 나무

2020. 12. 25. 01:1634 봄내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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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by Hans Braxmeier from Pixabay

 

 경칩이 지나 춘분이 다가와 땅속에서 월동하던 개구리도 뛰쳐나와 활동을 시작했고 시냇가 버들강아지도 볼록볼록 부풀었다. 제주도에는 유채꽃이 활짝 핀 소식이 전해오고, 섬진강변 광양에도 매화꽃이, 구례 산동의 산수유도 노랗게 꽃이 피었다는 소식이다.

 

 용마산 기슭 사가정 공원에도 봄기운이 느껴지는데 용마 조각상 옆의 몇 그루 나무는 아직도 누런 가랑잎을 그대로 달고 있다. 무슨 나무가 저리도 게으름을 피우고 있는 걸까. 이웃 산수유 개나리는 꽃망울이 부풀어 금세 터지려 하는데 때를 모르고 잠만 자고 있으니 내가 공연이 심난하다.

 

 활엽수는 겨울철에 나목이 되어 하늘을 향해 뻗어 있는 모습에서 나무의 기상을 본다. 찬바람이 세차게 불면 가지가 유연하게 춤을 추며 내는 휘파람소리가 겨울의 찬가처럼 들린다. 혹독한 시련을 겪으며 한겨울을 난 나무에 봄바람이 속삭이면 나무는 생기가 돌고 예쁜 삯(싹)이 돋는다. 봄비라도 내리면 봄이 성큼 다가와 꽃이 피고 새순이 날로 생기가 돋고 싱싱한 모습이 확연해 진다. 이런 나무의 생명력이 부럽다. 그런데 왜 이 나무들은 이리 갈잎을 둘러쓰고 있는 걸까?

 

 나는 매월 세 번째 토요일에는 꿈나무 산악회를 따라 산에 간다. 벌써 십 수 년째 회원들이 서울 근교 산행을 했다. 지난 3월은 청계산으로 가 산신제를 지냈다. 매년 3월 산신제에는 많은 회원이 참석해 행운을 빈다. 산악회를 창립 때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나오는 사람은 셋뿐이다. 꿈나무 산악회는 사단법인 꿈나무 장학회를 설립할 때 회원들 상호간의 친목 도모와 건강 증진을 위해 만든 산악회다. 현 이사장이 3대째로 회원들도 많이 신진대사가 되었다. 산악회장도 내가 십여 년간 맡아 하다가 건강 때문에 사임하고 현 회장이 맡았다.

 

 현 회장은 초등학교 교장 정년을 하고 중간에 참여했는데 열정이 대단해 산행 때마다 맛있는 안주를 꼭 준비해온다. 총무나 재무 간사도 몇 차례 바뀌었지만 현 총무와 재무간사가 봉사적이다. 그래서 금년 3월 산신제도 떡이며 돼지고기 과일 등 성찬을 준비했다. 산신령도 흐뭇해 하셨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사장이 참석하셔서 고축도 하시고 단합의 구심점이 되어야 하는 건데 이사장이 백두대간 산행 중이라서 참석 못했고 고문이신 명 교장도 건강 때문에 나오지 못했으니 초창기 창설 멤버로는 나만 나왔다. 생각해 보면 나뭇잎이 가을이 되면 자연스럽게 떨어지고 봄이 되어 다시 나는 것이 자연의 이치인데 아직도 분수를 모르고 목 매인 내 모습이 봄이 왔는데 아직 갈잎을 둘러쓰고 있는 나무 같다는 생각이 든다.

 

 3월 둘째 주에는 아들을 따라 우리 내외가 제주도 여행을 다녀왔다. 여행을 잘 하고 돌아와 보니 딸이 와서 현관청소를 깨끗이 해 놓았다. 두 줄 세 줄로 널려있던 신발을 깨끗이 치우고 내 키도 넘는 신발장에 신지도 않는 신발까지 다 버리고 신발장을 말끔히 정리해놓았다. 현관도 넓어 보이고 퀴퀴한 냄새도 나지 않아 좋다. 봄바람이 갈잎을 다 날려버린 것 같다.

 

 나는 오늘도 갈잎을 둘러쓰고 있는 나무 밑을 지나 헬스장에 다녀오면서 회색 두툼한 겨울 잠바에 털모자까지 눌러쓴 내 모습을 보았다. 그러고도 갈잎을 둘러쓰고 있는 나무만 게으르다고 탓하고 있는 것이다.

 

 

 

- 김준태, 중랑문학 2017 22호 p. 264-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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