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목

2020. 12. 27. 00:0034 봄내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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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by S. Hermann & F. Richter from Pixabay

 

 사전에서 고목을 찾아보니 고목(古木)과 고목(枯木)이 있다. 古木은 오래 묵은 나무요, 枯木은 말라죽은 나무란 뜻이다. 여행을 다니다 보면 고목(古木)을 더러 본다. 용문산 은행나무, 뱀사골 천년송은 천년을 살고도 싱싱하다. 젊어서는 이런 고목을 보아도 별로 감동이 없었는데 근래는 이런 나무를 보면 감회가 새롭다. 천년을 살았으니 고목(枯木)이 돼야 했을 나무인데 아직도 푸르고 싱싱한 생명력이 넘치니 그런 나무를 보면 경외감이 든다. 천수를 다한 고목(木)이 되어서도 귀한 것들을 길러내는 것을 본다.

 

 젊었을 때 산에 많이 다녔다. 한번은 설악산에서 2박을 야영하고 중청 끝청 귀떼기청 쪽으로 하산을 하는데 우람한 나무가 쓰러진 지 오래되어 보인다. 그 고목에 버섯이 다닥다닥 폈다. 지친 상태의 하산길이라 짐을 다 버리고 싶을 정도로 지쳐 발걸음이 무거운데 버섯을 보는 순간 욕심이 생겨 따다보니 배낭이 불룩해 더 넣을 수가 없다. 욕심이 끝이 없어 배낭을 채우고 양손에 들고 내려오다 결국 체력이 소진하여 손에 든 버섯은 다 버렸다. 인제 버스 정류장에서 시골 할머니를 만나 자연산 느타리버섯이란 걸 확인하고 버리고 온 것을 후회했다. 또 한번은 태풍이 지난 후 지리산 등산을 갔다가 참나무 고목에 핀 표고버섯을 많이 딴 일도 있다. 고목에는 상황버섯, 표고, 운지 등 귀한 버섯이 난다는 것을 TV를 통해 보았다. 전문 약초꾼 중에는 긴 쇠꼬챙이를 들고 다니며 죽은 소나무 밑을 쑤석거리더니 복령을 캐는 것도 보았다. 나무는 고목이 되어서도 남은 진액으로 버섯을 기르고 뿌리에서는 복령이 되어 약재로 식료로 인간에게 제공한다.

 

 아내가 파킨슨병과 치매로 아산병원 신경과 전문의의 진찰을 받고 그가 처방한 약으로 집에서 투병 중이다. 한번은 신경과 대기실에서 뇌 기증자를 찾는다는 광고를 보았다. 치매 연구를 위해서 환자나 건강한 사람 관계없이 사후 뇌 기증자를 찾는 광고다. 등록만 하면 언제 어디서 죽더라도 병원으로 운구해 뇌 채취를 한 후에 병원에서 장례식을 치러 준다는 것이다. 나무가 고목이 되어도 인간에게 버섯이나 약재를 제공하듯이 사람도 사후에 인류에게 공헌할 수 있는 길이 있다니 얼마나 다행인가. 나는 그날로 뇌 기증을 결심했다.

 

 작년에 사단법인 꿈나무장학회 강 이사장한테서 정인혁 교수가 날 한번 만나길 원한다는 이야길 들었다. 그가 췌장암으로 시한부 인생을 산다며 죽기 전에 자기 경험을 책으로 남기고 싶다며 나를 찾는다고 한다. 나는 그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내가 정 교수를 안 것은 그가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해부학 주임교수로 재임 중일 때다. 대한 해부학회 이사장도 역임하셨고 국제 해부학회에서도 명성이 높으신 분이다.

 

 1995년도 9월이다. 셋째 아들이 군복무 중에 소양강에서 익사했다. 그 슬픔은 말로 다 형언할 수 없었다. 사인이 규명될 때까지 군에서 마련한 임시 영안실에서 며칠간 절규하고 있는데 문득 한 생각이 떠올랐다. 젊은 시신인데 화장해서 묻어버리기엔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회에서 목사님 일행이 장례예배를 보러 오셨기에 시신을 대학병원에 기증하고 싶다 했더니 목사님이 연락하셔서 장례식날 연세대학에서 앰뷸런스가 와 의과대학 해부학실에서 만난 분이 정 교수시다. 그때 일을 잊지 않고 20여 년이 지났는데 나를 기억하고 만나자는 걸 보면 무엇인가 내가 도울 일이 있을 거란 생각이 들어 만났다. 정 교수는 '해부학을 통해 본 사회 모습'이란 저서에 '아들의 시신을 기증한 이야기'라는 제목의 글을 쓰고 장례식 광경을 저서에 남겼다. 2019.7.16 저자 친필 사인을 한 책을 보내왔다. 그리고 그해 겨울에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올 여름엔 유난히 장마가 길다. 아침 등산을 가는데 고목 두 그루가 쓰러져 등산길을 막아 나무 밑으로 기어가기도 그렇고 넘어가기도 부담스러워 뒤돌아 다른 길로 산에 올랐다. 우람한 나무인데도 비바람에 쓰러진 걸 보면 건강하다고 자부할 게 아닌 듯싶다. 80대 후반의 나이에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한 때라 언제 고목(枯木)처럼 비바람에 쓰러져 오가는 등산객에게 불편을 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표고나 느타리를 길러내는 고목(古木)이 되지는 못할망정 저리 행인에게 장애가 되는 나무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

 

 

 

- 김준태, 중랑문학 2020 25호 p.189-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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