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효의 한(恨)

2020. 12. 31. 00:0034 봄내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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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by Free-Photos from Pixabay

 

 우리 집은 효자 집안이다.

 

 고조할아버지가 효자셨고 아버지도 효자셨다.

 

 고조부의 효행포상은 대성학원 원주 참봉 이병식, 원장 참판 이범석 외 20명과 팔도 유사 8명이 서명 날인한 포상이다. 대성학원이라 함은 오늘날 성균관이다.

 

 아버지의 효행 천양문은 익산향교 전교 이종두, 유도회익산지부장 소석철 외 22분의 서명 날인한 효행기다. 그러니까 두 분 다 유림회에서 받은 표창장으로 우리 가문의 광영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50년이다. 나는 아들딸 삼남매를 길러 시집장가를 보내고 부부만 사는데 어버이날이 가까워지니 부모님 생각이 간절하다. 고조부와 아버지는 많은 사람들의 추앙을 받은 효자셨는데 나는 자식노릇을 제대로 못해 부끄럽다.

 

 옛날에 들은 효자 이야기가 생각난다.

 

 "근동에 소문난 효자가 있었더란다. 그가 어떻게 효도하나 보고 싶어 아침 일찍 그의 집에 찾아 가 보았는데 그의 아버지는 마당을 쓸고 있고 아들이란 자는 아버지 뒤만 어정어정 따라만 다니더란다. 효자라면서 어찌 저럴 수가 있을까? 괘씸한 생각이 들며 저런 자를 효자라 하다니 몹시 불쾌하게 생각하며 돌아왔다는 것이다."

 

 요즘 자식들은 부모님을 모시고 살려 하지 않는다. 분가해 살더라도 가급적이면 부모님집 가까이 살면서 자주 왕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현대는 전자 시대라 빨래도 밥도 청소도 다 전자용품이 한다. 그러나 늙은이들은 기기들을 다루는 솜씨가 서툴다. 은행 업무도 집에서 다 처리하는 시대인데 배워도 돌아서면 잊어버린다. 무슨 일이 발생하면 자식이 가까이 살면서 금세 달려와 주면 그것이 효도다.

 

 우리 형제는 칠남매다. 딸은 출가외인이라 치더라도 아들이 셋인데 부모님 말년에 모시거나 가까이서 사는 아들이 하나도 없었다. 

 

 장남은 광복 후 분가해 살다가 서울로 올라가 일 년에 두세 차례 고향에 다녀갈 정도고, 둘째는 일제 때 부산 시청에 근무하다 징집영장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8월 18일 입영날인데 15일에 해방이 되어 일본군 입대를 면했다. 그는 부산 직장에 복귀하지 않고 고향에서 교편을 잡고 결혼해서 부모님을 모시고 살면서 자식도 남매를 낳고 오순도순 살았다. 어느 날 처자식과 직장도 버리고 같은 학교 여교사와 야반도주를 해 행방을 몰랐다.

 

 나는 대학 졸업을 하고 전주에서 직장을 잡았다. 다른 형제들보다 부모님 가까이 살다보니 그나마 위안이 되셨던 것 같다. 맞벌이 부부로 단칸방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하다 보니 부모님을 모시고 살 처지가 못 됐다. 집에 오셔도 따뜻한 밥 한 끼 못 지어 드렸다. 주무시고 가실 방이 없으니 밤차로 돌아가셨지만 그래도 자주 오신 편이다. 주말에 우리가 찾아가면 그리 좋아하셨다.

 

 내가 대학 졸업식 때 아버지가 서울에 오셨다. 큰형님 사시는 것도 볼 겸 오셨는데 형님 사시는 걸 보고 크게 실망하셨던 것 같다. 졸업식날 학교 앞 식당에서 점심을 드셨다는데 급체를 하셨다. 서울대학병원에서 며칠간 입원하셨다가 황달이란 진단을 받고 고향집으로 돌아오셨다. 큰아들은 해방 후 일산 가옥을 불하받아 고래등 같은 집에 살았다. 그런 집을 매제에게 주고 서울로 가 단칸방에서 열 식구가 사는 것을 보셨으니 얼마나 기가 막히셨을까? 둘째 아들의 배신으로 생과부가 된 며느리의 심통에 아비 없는 손자 손녀의 뒷바라지까지 하시노라 심기가 불편하신데 큰아들마저 사는 꼴이 그 모양이니 부모 마음이 편할 리 없었을 것이다.

 

 우린 결혼 후 5년 되던 해 집을 샀다. 돈이 모자라 몸채는 전세를 주고 셋방에 살 듯, 방 두 칸을 우리가 썼다. 그래도 부모님이 보시기엔 대견하게 생각하셨던 것 같다. 집에 오셔도 쉴 데가 마땅찮아 그날로 돌아가시긴 하셨지만 그래도 좋으셨던 것 같다. 그런 부모님의 심정도 모르고 1969년도 2월에 나는 서울로 전근을 했다. 마음이 울적하셨나 보다. 임지에 부임하여 한 주 만에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내려왔다. 내 손을 꼭 잡고 운명하셨다. 내가 서울로 간다니 날 보겠다며 집을 나섰다가 어지럽다며 되돌아오셔서 자리에 누우셨다 한다. 황달이 재발하여 십 여일 만에 돌아가셨다. 그러니 어찌 한스럽지 않겠는가.

 

 자식이 울타리란 말을 팔십이 넘어서야 이해가 된다. 마당 쓰는 아버지 주변을 맴도는 아들이 왜 효자인가를 알겠다. 용돈 두둑이 드리고 고기반찬 사다 냉장고에 채워 둔다고 효자가 아니다. 모름지기 부모는 자식이 가까이 살면서 소통할 수 있는 것만으로 족하다. 효도가 어렵다거나 멀리 있는 게 아님을 자식들이 알았으면 한다.

 

 

 

- 김준태, 2019 중랑문인협회 회원선집 '별들이 내려앉은 중랑천' p.208-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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