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의 향수

2020. 12. 16. 00:0634 봄내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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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춘포리 구 일본인 농장 (출처: 익산시 홈페이지)

 

 

 고향은 향수의 샘인가 보다. 아무리 퍼내도 이런저런 이야깃거리가 마르지 않으니 말이다.

 

 내 고향은 만경강변의 한 농촌 마을이다. 사방을 휘휘 둘러보아도 산이라고는 십리 밖에 납작 엎드린 야산이 하나 있는데 공동묘지다. 동네에서 제일 높은 곳은 만경강 둑이다. 여기에 올라가면 500여 호의 상하 촌이 한눈에 다 보인다.

 

 봄이면 보리밭 밀밭 사이에서 우짖는 종달새 소리, 여름이면 새강(만경강)에서 멱 감으면서 조개도 잡았던 어린 시절이 아른거린다. 가을이면 논둑길을 달리며 참새 쫓다 지쳐 울어버리던 생각도 난다. 겨울이면 앞강(구강)에서 어름지치기도 하며 놀았다.

 

 밀물 썰물이 들던 만경강은 익산천과 합류하는 지점에 넓은 모래사장이 있었다. 음력 사월 초파일과 단오에는 흰옷 입은 인파가 대보 둑에 줄을 이어 성시를 이룬다. 이렇게 많은 인파가 모이는 것을 보면 모래찜의 효험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사람들의 발길이 뚝 끊겨 지금 젊은이들은 그 유명한 모래찜 터를 모르고 있다.

 

 우리 마을 이름이 대장촌이다. 나는 이 마을에서 태어나서 초등학교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호남의 황금 평야를 노린 일본의 구마모도현의 성주 호소가와 가에서 한일합방 전부터 경지정리를 하여 수리안전답을 만들고 일본 관리인을 대거 이주시켜 대장촌이란 마을을 형성했다. 그래서 우린 일인들과 이웃에서 살았다. 일제 때 전기가 들어오고, 초등학교 급수시설도 수돗물이었다. 마을도 웬만한 도시 못지않게 도시계획이 되었다. 마을 안까지 차가 들어오고 금융조합, 우체국, 면사무소, 주재소, 수리조합, 병원, 기차역, 마루보시, 신사(神社), 일본인 소학교, 변전소까지 여느 소도시 기능을 다 갖춘 마을이었다.

 

 광복 후 소작료를 안 내게 되니 대장촌은 살기 좋은 부자마을이란 소문이 났다. 그래서 두메산골에 살던 사람들이 많이 이사를 와 인구도 늘었다. 교통이 편리해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중학교는 익산(이리)이나 전주로 기차통학을 했다. 나는 전주로 기차통학을 하는데 전주에서 사는 아이들에게 대장촌놈이라 놀림을 당했다. 사실 반 아이들 중에는 두메산골에서 온 아이들이 많아 전깃불은 고사하고 자동차며 기차를 못 타본 촌놈들이 얼마나 많았는데, 마을 이름 때문에 촌놈 소리를 들으니 마을 이름이 얼마나 원망스러웠는지 모른다. 지금은 마을 이름을 춘포리로 개명했는데 일인들이 지은 이름이라 해서 그리 고쳤다 들었다.

 

 대장촌이란 이름이 촌스럽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바꾸기까지 한 것은 너무한 것 같다. 일인들이 그리 부른 이유가 있었을 것 같다. 전라선 대장촌역에서 전주 쪽으로 두 정거장만 가면 동산촌이란 역도 있었는데 여기도 일인들이 많이 살았다. 일본어로 촌(村)을 '무라'라 한다. 그러니 무라란 마을을 뜻하니 대장촌이란 '큰 마당 마을'이란 뜻이다. 대장촌은 500여 호나 되는 마을로 도시 계획이 되어 마을 안쪽까지 트럭이 다닐 수 있는 도로가 있고 금융 통신 교통 시설이 다 구비된 마을이다.

 

 몇 해 전에 마을 이름이 '춘포리'로 바뀌었다 들으니 고향을 잃은 것 같은 느낌이다. 기존의 마을 이름이 있어 본래 이름을 찾아 바꿨다면 바람직한 일이지만 대장촌은 일제 때 신흥 마을이다. 우리 마을은 일인들이 집단으로 이주해오면서 형성된 신흥 마을로 여기저기서 모여든 유민들이 형성한 마을이라 토박이가 없다. 우리 집도 조부 때 이사왔다는데 주변에서는 본토박이처럼 생각한다. 광복 후에 서울 시민의 식량 일부를 공급한 마을이다. 일본 사람들이 농로도 개설하고 수리안전답을 만들어 가뭄이나 홍수를 모르고 농사를 지었다. 넓은 들에서 수확한 벼를 호소가와 농장에서는 대형 정미소를 지어놓고 도정을 해 군산항으로 실어 나르기 위해 철로와 신작로를 개설했다. 우체국이며 금융조합 같은 금융 통신 기관이 있었고 면사무소, 주재소, 학교, 변전소, 수리조합 등 각종 시설들도 다 있는 마을이다.

 

 우린 일제 식민지시대를 부끄럽게 여겨 기존의 것을 없애거나 지우기만 하면 될 것처럼 생각하고 허물거나 이름을 바꾸거나 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사실을 인정할 것은 인정해서 산 증거물로 남겨두고 역사의 교육장으로 활용해야 했다. 이제 자라는 아이들은 나처럼 촌놈 소리는 안 들어 좋을지 모르지만 근래에 고향에 내려가보면 윤이 번지르르 나던 마을의 모습은 찾아볼 길이 없고 근동에서 제일 촌스러운 마을로 전락해 진짜 촌놈이 되어 있어 안타깝다. 신교육을 받은 원주민들은 다 도시로 떠나고 새로 이사온 사람들이 들어와 살면서 기존의 것은 다 없애버려 고향에 가야 낯설어 공허한 느낌만 들으니 차라리 촌놈 소리를 들었던 때가 그립다.

 

 

- 김준태, 보고 들으며 걸어온 길 p.77-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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