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면목(眞面目)

2020. 12. 13. 23:0534 봄내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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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마폭포공원 (출처: 한국관광공사 홈페이지)

 

 아들 자랑 마누라 자랑은 팔불출의 하나라지만 마을 자랑한다고 설마 불출이라고야 하겠는가? 분당에 사는 지기(知己) 한 분이 자기 사는 동네가 천당 바로 아랫마을 분당(分堂)이라며 분당(盆唐)으로 이사 오라는 것이다. 면목동은 면목 없는 사람이 사는 곳인데 면목동에 사느냐며 놀리곤 한다. 그와 흉허물 없는 사이라서 웃자고 하는 이야기지만 한두 번 듣다보니 은근히 부아가 나서 면목동이 얼마나 살기 좋은 마을인가 자랑 좀 하려 한다.

 

 면목동에 산 지 어언 32년이 되었다. 1969년도부터 살았으니 내가 생각해 봐도 꽤 오래 살았다. 이사 올 때만 해도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없이는 살 수 없다는 동(洞)이었는데 무엇이 그리 좋아 지금까지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유행가 가사에 "고향이 따로있나 정들면 고향이지"라 했던데 정이 든 모양이다.

 

 20살 전후에 떠난 고향은 직장 따라 유랑하다보니 부모님 생전에는 일 년에 몇 차례 다녔지만 막상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로는 그마저 발길이 뜸해졌다. 그런 내가 면목동으로 이사한 후로는 아들딸 다 여기서 길러 가르치고 시집 장가 보냈다. 특별히 불편한 점도 없어 이곳에 눌러 살다보니 고운정 미운정 다 들어 누가 뭐래도 여기가 내 분당(천당 아랫마을)이요 고향 같으니 어찌하랴.

 

 나는 풍수지리는 잘 모른다. 그러나 들은 풍월에 의하면 배산임수(背山臨水)한 지형이면 명당의 첫째 조건이라 하던데 면목동이 바로 그런 동네다. 용마산 아차산이 포란지형(抱卵之形)으로 암탉이 알을 품은 형상의 마을이 면목동이다. 마을 앞으로는 중랑천이 유유히 흐르고 있고 서남간은 툭 트여 남산을 향해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용마산 좌우로는 봉화산과 아차산이 있어 좌청룡 우백호가 마을을 감싸고 있으니 이 또한 명당임이 분명하다. 마을 사람들이 아침 저녁으로 산을 오르내리며 체력단련하기에 알맞은 산이다. 높이 348m 밖에 안되지만 정상에 서면 사방이 막힌 곳이 없이 툭 트여 해돋이며 낙조까지 볼 수 있다. 동서남북 가린 데가 없어 서울이 한눈에 다 들어오고 공자님이 등동산이소노(登東山而小魯)라 한 말씀을 생각나게 한다.

 

 장안에 사시는 분들이여! 해돋이 보려거든 다 이리 오시오. 서광천장(曙光千杖)의 아침 햇살을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용마산이라오. 새해 첫날 해돋이 보려고 지리산 천황봉, 한라산 백록담, 정동진 영일만 등 명승지 찾아 가노라 고생할 것 없소이다.

 

 그런데 장안의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었나보다. 정초에 해돋이를 보려고 몰려온 인파로 용마산과 아차산은 인산인해를 이룬다. 즈믄 해맞이 인파가 그랬고, 21세기 첫 해맞이가 그랬다. 수많은 사람들이 어둠을 뚫고 올라와 감격의 해맞이를 하면서 무엇을 빌었을까? 건강과 가정의 행복을 빈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사업을, 남북통일을 기원하는 사람들도 모였을 것이다.

 

 정상에서 해맞이를 하다보면 여명에 한강의 윤곽이 드러나고 아스라이 팔당에서 덕소로 흐르는 강물이 바로 아차산 앞을 휘돌아 올림픽대교, 영동교를 지나 남산에 문안하고 멀리 서해로 흐르는 모습도 장관이다. 이 강을 두고 영고성쇠(榮枯盛衰)의 역사적인 사건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산등성이에서 바라보면 강 건너편에는 암사 선사유적지가 있고, 백제가 쌓은 위례성터도 보인다. 그런가하면 고구려는 이 산에서 온달성을 쌓고 한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었으니 한강은 일촉즉발의 전운이 감도는 국경지대였다.

 

 광나루는 국제 관문이요, 국제 교역항이기도 했을 것이다. 병자호란 때는 군수품을 실은 배가 남한산성에 피신한 왕을 돕기 위해 거센 물살을 거스르며 악전고투하던 모습도 연상된다. 현대사의 비극도 안고 말없이 흐르는 한강물은 서울 인천 경기도민의 생명수의 공급원이며, 한강의 기적을 창조한 우리의 자랑이다. 아침 햇살이 비치는 산에서 바람이 살랑살랑 불면 은린 금린이 하상에 생겨 새로운 감동을 준다. 햇빛이 강하게 비치는 날엔 홍해를 가르는 모세의 기적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눈이 부시도록 찬란하다는 금문교라한들 이보다 더 아름다울 수는 없을 것 같다.

 

 낙조 또한 일품이다. 어느 날 석양에 우연히 정상에 올랐다가 낙조를 보았다. 공해로 시내가 흐릿한데 남산 송신탑 꼭대기에 매단 빨간 풍선 같은 해가 인왕산 너머로 지는데 서방정토가 있다면 바로 저 모습일 것 같다. 인왕산 북악산은 손에 잡힐 듯 하고 청계산 관악산은 남서쪽의 울타리 같다.

 

 계절 따라 변하는 산에 봄이면 진달래, 벚꽃이 섞바뀌어 피고, 오뉴월에는 지천으로 널려 있는 아카시아 꽃이 포도송이처럼 주렁주렁 달린다. 그 진한 향기는 온 산과 마을까지 내려와 코끝이 향기롭다. 꿀벌들은 횡재라도 만난 듯이 윙윙거리고 이 꽃 저 꽃 넘나들며 꿀따기에 바쁜데 나는 한가롭게 산에 오르기가 흥겹다. 꽃잎 하나 따다가 자근자근 씹어보면 달콤한 아카시아 향이 입안에 가득하다. 산새들의 교태도 흥겨워 덩달아 나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오른다.

 

 그렇게 탐스럽던 꽃잎이 한 잎 두 잎 떨어져 밤사이 하얀 양탄자랄까 하얀 눈이 내린 것 같다. "낙환들 꽃이 아니랴 쓸어 무삼 하리오" 시조 한 구절이 생각난다. 옛 시인의 정취를 알 듯하다. 이 산이 나에게는 산책로며 사색의 길이다. 걸으면서 지난 일들을 묵상하고 오늘 할 일을 계획해본다. 어쩌다 거르는 날이면 중요한 것을 빠뜨린 것 같아 허전하다.

 

 이 산은 역사의 산실이며 교육의 장이기도 하다. 아차산성과 온달샘이며 봉화산의 봉수대가 그렇고 근대사 현대사에 혁혁한 공적을 남긴 분들이 남긴 묘역이다. 나는 일 년에 한두차례 유치원 원아들을 데리고 이 산에 오른다. 길이 잘 닦여 있어 산을 한 바퀴 돌다보면 한용운, 오세창 선생의 묘앞을 지날 때는 3-1 운동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방정환 선생님은 어린이날을 제정하고 어린이가 나라의 주인인 것을 말했고, 지석영 문일평 같은 선생이 계셨기에 천연두와 같은 당시로서는 무서운 전염병을 퇴치할 수 있었고, 국학을 정리하여야 문화국민으로 설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다보면 망우리 묘역을 한 바퀴 도는 시간이 짧다. 수없이 많은 선열들의 유택(幽宅)을 모시고 사는 면목동이야말로 자랑스러운 학습장이다. 

 

 산을 보았으니 강으로 가자. 한강이 서울 시민의 강이라면 중랑천은 중랑 구민의 강이다. 중랑구란 명칭도 중랑천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한때 중랑천 하면 오염된 강의 대명사처럼 인식 되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철새가 날아오고 강태공들이 월척을 낚는 낚시터가 되었다. 몇 해 전에 낚시를 좋아하는 면목고 선생님이 중랑천에서 잡은 월척 쏘가리를 교무실 어항에 넣어 기른 일이 있다. 일급수에서만 산다는 황쏘가리이고 보면 중랑천이 얼마나 정화되었는가를 알 만 하다.

 

 기록에 보면 왕이 동구릉 능행길에 중랑천변에서 쉬면서 점심을 드셨다니 옛날에야 얼마나 물이 맑았으랴. 인구 팽창과 상류의 공장 폐수로 하천이 오염되었지만 자치단체와 정부의 꾸준한 정화 사업으로 맑은 냇물이 마을 앞을 흐르게 되었다. 얼마나 고맙고 다행스런 일인가. 우연한 기회에 구청장하고 동석한 일이 있어 넌지시 '자치단체 장으로 4년 임기 중에 남긴 업적이라면 맨 먼저 무엇을 꼽겠느냐'고 했더니 그의 첫마디가 중랑천 정화 사업과 구민 위락 시설이란다.

 

 나는 운동 삼아 자전거로 중랑천 일대를 돌아본 일이 있다. 하상 정비는 말할 것도 없고 고수부지에 각종 위락시설을 만들어 놓았다. 축구장, 농구장, 배드민턴장 등 각종 운동장이며 산책길 자전거길도 만들어 어떤 문화 행사나 체육대회를 하는데 손색이 없도록 시설을 갖추었다.

 

 둑에는 장미와 벚꽃 나무를 심어 꽃길을 만들어 구민들의 휴식 공간이 되었고 고수부지도 봄이면 유채꽃이 만발하여 냇물까지 노랗게 물들였고, 메밀꽃이 새하얗게 피는 여름밤이면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에 나오는 봉평의 메밀밭을 연상케 한다. 가을에는 무배추를 심어 가을의 풍요로움을 더하는데 이 채소로 김장을 담아 불우 이웃을 돕고 고아원 양로원에 나누어 준다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산 좋고 물 맑은 고장에 인정마저 따뜻하니 이보다 살기 좋은 동네가 어디가 또 있으랴.

 

 우리 이웃에 사는 할머니 한 분은 김치 담았다고 한 보시기, 깻잎 절였다고 한 접시, 감자 삼고 고구마 쪘다며 철철이 별미를 가져오는데 장안의 어디에서 이만한 정을 나누며 사는 동네가 있으랴. 이런 천당의 길목에서 사는데 분당으로 이사 오라니 되레 이런 곳으로 친구가 이사 오라 했다.

 

 용마산이 있고 중랑천이 흐르는 면목동엔 따뜻한 인정마저 넘치는 이웃이 있는데 이곳이 분당(分堂)인 걸 이곳을 두고 어디로 이사를 간단 말인가. 나는 면목동이야말로 서울의 진면목이라 자부하며 이 마을에 오래오래 살련다.

 

 

- 김준태 수필집 '보고 들으며 걸어온 길' p.10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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