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송산의 삶(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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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의 느티나무
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우산을 쓰고 거리로 나섰다. 발길 닿은대로 중랑천을 따라 장평교까지 갔다. 근처에 있는 커피숍에 들러 커피라떼를 마셨다. 커피향은 언제나 기분이 좋다. 내 옆자리에는 초로의 중년남성 두 분이 커피를 마시며 심각한 표정으로 경제문제에 대하여 열심히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옆에서 듣자니 사사건건 옳은 말이다. 요즈음 소상공인들의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닌가 보다. 정부는 지난해(2018) 말 최저 임금법 시행령을 개정하면서 주휴시간도 근로시간을 계산할 때 포함시키도록 명시했다. 최근 최저임금이 급속히 오르면서 소상공인들은 주휴수당을 최저임금에 포함시키던지 아니면 없애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올해 최저임금(시급 8,350원)에 주휴수당을 포함하면 '실질 최저임금'은 1만 30원으로 이미 1만..
2021.01.03 -
봄을 기다리는 길목
초봄인데도 날씨는 아직도 냉랭한 겨울날씨 같다. 미세먼지로 갇혀 살다 오랜만에 길을 나섰다. 경복궁역에서 내려 통의동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30년 전까지 가끔 왔던 곳인데 기억에서만 아물아물 하다. 이런 저런 기억을 더듬으며 큰 길을 따라 쭉 올라가니 인왕산 자락길에 다다른다. 낯선 듯 낯설지 않은 수성동 계곡이다. 이곳이 바로 진경산수화의 대가 겸재 정선이 그린 그림의 실제 배경지이다. 우수가 지났는 데도 잔설이 남아있고 꽁꽁 언 얼음 밑으로 계곡의 물이 조금씩 졸졸 흐르고 있다. 이따금씩 불어오는 소소리 바람에 봄을 기다리는 마른 갈대는 쏴악쏴악 서걱서걱 아픈 소리를 연달아 지르고 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몸이 움츠러들고 을씨년스럽다. 억새의 신음소리에 외투 깃을 올려 바람을 막아본다. 인왕산 쪽으로..
2021.01.02 -
삶이란 (2018.02)
황혼녘 고갯마루에 오르니 하늘가에는 붉은 노을이 몇 갈래로 길게 이어져 나갔다. 문득 기억의 갈피 속에 넣어두었던 수많은 일들이 아물아물 지나간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짧아진 것을 생각해보는 요즈음 '삶이란 무엇인가?' 자문해본다. 삶이란 자신이 태어났을 때 주어진 가능성을 하나하나 펼침으로서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건너다보이는 산을 힘겹게 오르며 저기 저 고갯마루까지만 오르면 그 다음은 바로 정상에 오르고, 기쁨과 숨고르기가 끝나면 내리막길로 천천히 오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가자고 자기 자신을 격려하고 힘을 주면서 걸어가는 길이다. 그러나 산에 오르는 것은 큰 산이든 작은 산이든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자칫 한눈을 판다든가 실수를 하면 발을 헛디뎌 발목을 삐든가 낭떠러지..
2020.12.30 -
한강에서 (2017.09)
모처럼 유람선을 탔다. 물의 일렁임이 볼 때와는 다르게 더 크게 다가온다. 보기에는 서울이 한강을 둘러싸고 있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오히려 한강이 주변의 서울을 품고 있다. 하늘과 구름까지도. 한강은 40여 년 전 만해도 봄에는 강변에 달래, 냉이, 쑥이 다보록이 자라 서민의 밥상을 풍성하게 해주었다. 그때 나는 옆집 아줌마를 따라 쑥도 뜯고 냉이를 캐다가 된장국도 끓이며 흐뭇해했다. 내 아이 다섯이 줄줄이 자랄 때는 미역 감고 물놀이할 만한 곳이 없어서 여름방학 때면 아이들과 가끔 가던 곳이 뚝섬이었다. 뚝섬에서 실컷 물놀이하고 나서 나무그늘에 앉아 도시락을 펼쳐 놓으면 아이들이 그리 좋아했다. 한동안 지우개로 지우듯 하얗던 마음이 망각의 고리를 벗기고 갇혀있던 기억을 하나씩 일깨우고 있다. 그때 나는 ..
2020.12.28 -
열린 마음 (2016.05)
음각으로 새겨진 두 개의 표지석이 있다. 洗心洞(세심동)과 開心寺(개심사). '마음을 씻고 문을 열라'고 한다. 그동안 걸어 잠갔던 마음을 열고 마음을 깨끗이 씻어보자. 이곳은 중학교 봄소풍 때 와보고 60년 만이다. 지난 세월이 필름같이 지나간다. 어려서부터 지기 싫어하는 성격으로 고집세고 잘난 척하다가 엎어지고 일어난 것이 몇 번이던가. 고달픈 삶 속에서 까맣게 잊고 지내다 경지(鏡池)에 비친 모습을 바라보니 삼단 같던 머리털과 풋풋하던 소녀는 어디가고 흰서리를 맞은 할머니가 서 있다. 세상사 마음대로 되었다면 지금쯤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수도 있었을 텐데 제대로 차근차근 준비도 하지 못하고 급하게 서둘다 일을 그르친 적이 얼마였던가. 그러나 사실 준비할 시간도 충분히 없었고 기회도 얻지 못하고..
2020.12.27 -
머무는 자리 (2017.11)
휭 하고 바람이 불 때마다 가로수의 낙엽이 어지럽게 흩날린다. 길을 건너 배봉산공원에 올랐다. 둘레길을 걷가가 의자에 나보다 먼저 자리한 낙엽을 한쪽으로 쓸고 걸터앉았다. 가을은 벌써 이 낙엽처럼 소리 없이 와 있다. 서산에 넘어가는 햇살을 받으며 가을의 길목에 오니 왠지 쓸쓸하다. 머리 위로 사르르 떨어지는 나뭇잎 소리에 눈물이 핑 돈다. 이제는 세월에 초연한 줄 알았는데 아직도 만추의 향기에 서글퍼짐은 어인 일인지...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지만 고희가 지나니 몸과 맘이 약해지는 것은 피할 수 없나 보다. 움츠렸던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봤다. 산책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기구에 매달려 열심히 운동하는 사람도 많다. 모두 오는 가을을 막아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 같아 쓸쓸하다. 이곳은 200년 전 사..
2020.1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