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기다리는 길목

2021. 1. 2. 00:0042 송산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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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by HeungSoon from Pixabay

 

 초봄인데도 날씨는 아직도 냉랭한 겨울날씨 같다. 미세먼지로 갇혀 살다 오랜만에 길을 나섰다. 경복궁역에서 내려 통의동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30년 전까지 가끔 왔던 곳인데 기억에서만 아물아물 하다. 이런 저런 기억을 더듬으며 큰 길을 따라 쭉 올라가니 인왕산 자락길에 다다른다.

 

 낯선 듯 낯설지 않은 수성동 계곡이다. 이곳이 바로 진경산수화의 대가 겸재 정선이 그린 그림의 실제 배경지이다. 우수가 지났는 데도 잔설이 남아있고 꽁꽁 언 얼음 밑으로 계곡의 물이 조금씩 졸졸 흐르고 있다.

 

 이따금씩 불어오는 소소리 바람에 봄을 기다리는 마른 갈대는 쏴악쏴악 서걱서걱 아픈 소리를 연달아 지르고 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몸이 움츠러들고 을씨년스럽다. 억새의 신음소리에 외투 깃을 올려 바람을 막아본다. 인왕산 쪽으로 발길을 돌리는데 겨울나무가 앙상한 가지에 바싹 말라버린 몇 개의 잎을 붙인 채 봄을 기다리고 있다. 봄이 오는 소리를 들으려고 귀를 귀울여본다.

 

 굴곡진 산기슭을 타고 오르며 잘 가꾸어 놓은 산책로에 이르니 젊은 남녀가 정겨운 시간을 나누고 있다.

 

 길섶에는 어느덧 누런 잔디를 헤치고 봄을 맞는 냉이와 쑥 등 새 생명이 숨을 쉬고 있다. 그 추운 겨울 차가운 날씨에서도 땅속 깊이 뿌리를 박고 죽을 힘을 다해 물을 빨아들여 새 생명을 틔우는 냉이의 생명력이 발길을 잡는다.

 

 숲에서는 바람이 불 때마다 실로폰 소리가 난다. 실로폰 소리에 장단을 맞춰 고갯마루에 오르니 서촌 전망대다. 사방을 둘러보니 북악산, 인왕산, 낙산이 보이고 남으로는 목멱산, 북으로는 북한산이 병풍같이 서울을 두리고 있다.

 

 발길을 재촉하여 '시인의 언덕'에 오르니 언덕배기엔 벌써 가지마다 꽃망울을 꽉 채운 매화가 화사한 봄빛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10여 일만 지나면 꽃봉오리가 살짝 벌어지면서 그윽한 향기를 수줍은 듯 발산할 것이다. 그 옆에는 어느덧 산수유가 살포시 웃음을 띠며 반긴다.

 

 윤동주문학관을 찾았다. 시인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를 다니던 시절 종종 이곳 인왕산 언덕에 올라 이곳에서 '별 헤이는 밤', '자화상' 등의 시정을 다듬었다고 한다.

 

 그런 인연으로 종로구는 2012년 인왕산 자락에 버려져 있던 청운수도가압장과 물탱크를 개조해 윤동주문학관을 만들었다. 가압장은 느려지는 물살에 압력을 가해 다시 힘차게 흐르도록 도와주던 곳이다.

 

 우리는 때때로 세상사에 지쳐 타협하고 비겁해질 때가 있다. 이럴 때 윤동주의 시는 우리 영혼에 아름다운 자극을 주고 영혼의 물길을 정비해 새롭게 흐르도록 만드는 힘이 있다. 이곳에서 인간 윤동주를 만나고 느껴본다. 그와는 2006년 연변 용정에서 윤동주 시인이 다니던 대성중학교와 윤동주 전시관을 둘러본 이후 두 번째 만남이다. 그는 1917년 일제강점기에 중국 길림성 명동촌에서 태어나 28년 생애의 절반인 14년을 그곳에서 보내면서 자연과 신앙 그리고 민족주의를 접하며 식민지 현실에 분노하며 시를 썼다. 1941년 12월 27일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42년 4월 2일 도쿄의 릿쿄대학 문학부 영문과에 입학했지만 조선의 독립을 구상했다는 명목으로 체포되고 투옥된 후 비참하게 요절한 청년시인이다. 두 번째 윤동주와 마주하니 새삼 가슴이 아리다.

 

윤동주 시인

 봄을 기다리는 길목의 윤동주문학관에서 그의 힘찬 맥박을 느끼고 순결하고 꼿꼿한 시정신을 반추해 본다. 청춘을 사랑하고 민족과 시대에 대해 고뇌하며 썼던 그의 시는 바장해서 눈물겹고 그래서 더 아름답다.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 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 '자화상' 중에서

 

 

 '자화상'은 우물 속을 들여다보며 어쩜 자신을 읊은 것이 아닌가 생각하니 일제시대 창씨개명을 앞두고 절박했던 시간들이 보인다. 내 영혼의 물길도 별 하나의 사랑과 내일 밤을 기다리는 순수한 심정으로 재탄생하고 싶다.

 

 언덕배기에는 여전히 찬바람이 소리 내어 불고 겨우내 내린 눈이 쌓여있는데 양지바른 길섶에는 복수초가 영롱한 빛을 발하며 봄 소식을 알린다. 하루가 다르게 싹을 틔워 꽃을 피워내는 길에서 천천히 발길을 옮긴다.

 

 

 

- 홍사임, 문학시대수필 제6집 2020 '추억의 방에 우리 모두' p.178-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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