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무는 자리 (2017.11)

2020. 12. 27. 01:2842 송산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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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by StockSnap from Pixabay

 

 휭 하고 바람이 불 때마다 가로수의 낙엽이 어지럽게 흩날린다.

 

 길을 건너 배봉산공원에 올랐다. 둘레길을 걷가가 의자에 나보다 먼저 자리한 낙엽을 한쪽으로 쓸고 걸터앉았다.

 

 가을은 벌써 이 낙엽처럼 소리 없이 와 있다. 서산에 넘어가는 햇살을 받으며 가을의 길목에 오니 왠지 쓸쓸하다. 머리 위로 사르르 떨어지는 나뭇잎 소리에 눈물이 핑 돈다. 이제는 세월에 초연한 줄 알았는데 아직도 만추의 향기에 서글퍼짐은 어인 일인지...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지만 고희가 지나니 몸과 맘이 약해지는 것은 피할 수 없나 보다. 움츠렸던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봤다. 산책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기구에 매달려 열심히 운동하는 사람도 많다. 모두 오는 가을을 막아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 같아 쓸쓸하다.

 

 이곳은 200년 전 사도세자가 수원 화성으로 떠나기 전 잠시 머물렀던 묘지가 있던 곳이다. 이 산의 봉우리를 보면 누구나 절을 하라고 그 당시 '배봉산'이란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봄이면 벚꽃과 이팝나무꽃이 만발하고 상큼한 초여름엔 아까시꽃의 짙은 향기가 온 동네를 뒤덮고 가을에는 고운 단풍으로 아름다움을 장식하는 곳인데 어느덧 낙엽이 뒹굴고 있다. 여름이 떠나고 가을이 왔으니 머지않아 겨울이 온다는 예고이다.

 

 낙엽이 쌓인 길을 걷다보니 어느새 내 인생도 가을을 지나 초겨울로 접어드는 것을 알았다.

 

 겨울로 접어드는 남은 인생, 모든 것을 잘 정리하고 떠나는 것이다. 그동안 아름다운 삶이었다고 스스로 답하기 위해 남은 생애 더욱 최선을 다하자고 다짐해본다.

 

 사람은 누구나 빛과 그림자의 생활 속에서 살아간다.

 

 칠순이 지나니 매사에 자신이 없어지고 부정적일 때가 많다. 자연에 순응하는 물처럼 도도히 살자 하고, 거스를 때도 많고, 책을 읽어야 한다면서 금방 잊어버릴 때도 많다. 책을 읽어도 금방 잊어버리는 나이에 내 속에 깊이 묻혀있는 문맥의 줄기를 찾아 글다운 글을 쓴다는 것이 쉽지 않다.

 

 사람들이 말하길 어떤 일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 필요한 시간은 1만 시간이라고 한다.

 

 운동선수가 되기 위해서 3년 동안은 꼬박 하루에 10시간씩 운동을 하는데 글다운 글을 써보겠다고 하면서 게으름을 피우는 것은 자기기만이다.

 

 이제부터는 내가 머물러야 하는 자리, '지어지선(止於至善)'은 다름 아닌 글다운 글을 쓰는 작가다.

 

 '지어지선'은 개인적인 이상을 추구하는 말로 지극히 착한 경지에 이른다는 뜻으로 '대학'에 나오는 글이다. 70평생 느끼고 체험한 이야기를 객관적 작품이 되도록 착하고 진속하게 쓰는 것인데 수습작가 딱지를 뗀 지 일천하여 제대로 따라 주질 않는다. 가끔 밤늦게까지 글을 쓰다 보면 다음 날은 피곤해서 견디기 어려울 때가 많다. 언제까지 글을 쓸 수 있을지 알지 못하지만 얼마나 많은 글을 읽고 써야 글다운 글이 나오려나... 발걸음이 무겁다.

 

 시리도록 파란 하늘에 해무늬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아름다운 노을이다. 아직도 미완으로 남은 일들을 어떻게 마무리 지을 것인가. 낙엽을 밟으며 사색의 끈을 이어본다.

 

 

 

- 홍사임, 고갯마루에 올라 p.124-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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