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국화 향기

2020. 12. 20. 18:2242 송산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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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by dae jeung kim from Pixabay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요즈음 아파트 화단에는 보라색과 흰색의 들국화가 아름답고 진한 향기를 아침저녁 뿜어내고 있다. 소슬바람 속에 묻어나는 국화 향기는 가을의 운치를 더욱 깊이 드리우고 있다. 

 

 가을철 산이나 들이나 어느 곳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들국화다. 들국화는 다년초라서 그 종류도 많고 고고한 기상을 가진 관상용 명화이기도 하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꽃은 들국화다. 그것은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어려서는 찬 눈 속에서 고고한 자태로 피어나는 매화를 좋아했다. 그러던 것이 대학교 시절 S를 만나고부터 들국화를 좋아하게 됐다.

 

 대학교 1학년 2학기 때였다. 여름방학이 끝난 어느 날 양현재 은행나무 아래에서 고향에 사는 Y를 통해서 S를 처음 만났다.

 

 그는 우리 학교 인근 대학의 학생이었는데 나보다 한 학년 위였다. 굉장한 학구파며 철학이나 문학에도 꽤 조예가 깊은 것 같았다.

 

 이후로도 그는 나를 몇 번 찾아왔다. 우리 학교 근처에 작은어머니와 조카와 함께 살고 있다고 했다.

 

 그러던 10월 어느 날 그는 나에게 가끔 만나서 책을 읽고난 후 독후감을 함께 이야기 하면 어떻겠냐고 제안을 하기에 나는 좋다고 답변했다.

 

 그가 단테의 '신곡'을 읽어 봤냐고 물어 보기에 아직 읽지 못했다고 했더니 자기 집에 있으니 같이 읽고나서 그에 대한 토론을 하면 어떻겠냐고 했다.

 

 단테의 '신곡'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리스, 로마 신화와 역사를 알아야 하기에 나는 차분하고 논리정연하면서도 겸손한 그와 대화하는 것이 좋아서 도전하기로 하고 '그리스 로마 신화'에 대하여 공부했다. 신화의 세계란 본래 미궁과 같아서 신화를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달려 있다.

 

 신화의 세계에 한번 발을 들여 놓으면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어 계속 헤매게 되는데 그때 상상력의 나래를 펴고 빗장을 열기 위해서는 신화에 대한 이해와 해석의 열쇠가 필요하다. 그 열쇠를 먼저 찾아서 손에 쥐어야 미궁의 진입과 탈출을 할 수 있다.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전 인류에게 영원불멸의 거작인 '신곡'을 나는 그때 처음 읽었다.

 

 우리는 어느 날 대학 다방에서 커피를 마시고 대학가에 노오란 은행잎이 수북이 쌓여있는 길을 지나 광화문에 있는 국제극장에서 나타리우드와 워렌비티 주연이 '초원의 빛'을 감상했다. 영국의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1770~1850)의 장시 중 '한때 그렇게도 찬란했던 빛이었건만/ 이전 눈앞에서 영원히 사라져버린/ 초원의 꽃이여, 꽃의 영광이여...'에서 제목을 따온 것이다. '초원의 빛'은 정말 감상적이고 첫사랑을 일깨워주는 아련하고 슬픈 영화였다.

 

 나는 그 영화를 보는 동안 눈물을 얼마나 흘렸는지 손수건 두 개가 모두 흠뻑 젖었다. 그는 내가 정감이 있고 여자다운 여자임을 알게 된 귀한 시간이었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동안 그렇게 수줍어 보기는 난생처음이었다. 우리는 인도 카레로 늦은 점심을 먹은 후 정릉에 있는 경국사를 산책했다. 

 

 정릉 산 속에 어쩜 그리도 맑고 진한 향기가 있어 우리를 반겨 주던지.... 그날 찬바람 서리 속에서 강한 생명력을 품은 들국화가 진한 향기로 우리를 완전히 감싸 안았던 것이다. 꽃은 다 아름답지만 그날따라 들국화가 더 아름다워 보였다.

 

 인생에 있어서도 젊은 시절을 두고 꽃다운 청춘이라고 한다. 우리는 꽃다운 청춘의 열정을 1년 넘게 독서와 토론에 쏟았다.

 

 그는 겨울방학동안 30통이 넘는 편지를 시골집으로 보냈다. 3일에 한 번씩 우체부가 편지를 배달하니 집안 식구들이 내용을 궁금해하기에 한 번 읽어주었더니 그 다음부터는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 내용은 파스칼의 '명상록'과 헤르만헤세의 '데미안' 등의 독후감과 책을 읽은 소회와 자신의 일과였다.

 

 2학년 때도 일주일에 한두 번씩 만났는데 그때 일요신문에서 특집으로 대학가의 명물시리즈에 8단통으로 내가 성균관대 학교 대표로 나왔었다. 그때 그의 작은어머니가 나를 찾아와서 꿈이 많은 학생들이니 이제 그만 만나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하기에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그 후에도 그가 두 번 찾아왔지만 냉정하게 거절했다.

 

 돌아보니 지성과 낭만의 가치를 느끼며 꿈과 열정이 넘쳤던 때였던 것 같다.

 

 인생의 가치관 확립은 젊은 시절 만나는 사람과의 관계에 따라 많은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를 만나기 전까지 삶의 문제에 대하여 치열하게 고민하지 않았는데 내 자신에 대하여 이때부터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한 것 같다. 그때 인생에 대하여 고뇌하는 법을 배웠기에 그 후 내게 다가오는 운명을 받아들이며 맞서 왔다.

 

 나는 긴 세월 어려움을 혹독하게 겪으면서도 독서의 세계를 마음의 고향으로 삼아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요즘도 때때로 들국화 향기 속에 아련한 추억을 맛보며 희망의 그림을 그리는 시간에 빠져 들기도 한다.

 

 들국화는 누가 심거나 관리하지 않아도 척박한 비탈길이나 언덕 위 깊은 산속이나 들판에서도 뿌리를 박고 자생한다. 누가 가꾸거나 보아주지 않아도 가을이면 꽃을 피우는 들국화는 생명력이 강할 뿐 아니라 그 향기를 멀리까지 보낸다.

 

 들국화의 청초한 빛과 진한 향기는 오늘도 나의 발걸음을 붙잡으며 가슴 깊은 곳에 잠자던 나의 영혼을 일깨운다.

 

 어쩌면 들국화 향기는 투명하게 밀려드는 물빛 같은 그리움으로 나를 불러내고 있는 것 같다.

 

 

- 홍사임, 고갯마루에 올라 p.3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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