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6월

2020. 12. 25. 02:1442 송산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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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4년 6월은 내 인생에 큰 획이 그어진 달이다.

 

 학생운동 여학생 구속자 1호가 된 후 60~80년대 군사정권 시절 수사정보기관에 붙들려가는 일이 잦았다.

 

 매번 연행되어 가면 '유언비어 날조'니 '시위조종'이니 '불온 비라소지'니 하며 죄목을 달려고 하는 쪽과 승강이를 벌이다 요식행위니 앞으로는 위법행위를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나가라는 식으로 풀어주는 것이다.

 

 1964년 6월 3일 전국의 수많은 학생들이 '굴욕적 한일회담 반대'와 '박정희 정권 퇴진'을 요구하며 대규모의 데모를 벌였다. 이에 위협을 느낀 박 정권은 서울 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천여 명의 학생들을 체포했으며 심지어 수십 명의 학생들을 내란죄로 군사법정에 세워 수개월 동안 서대문형무소에 수감하였다.

 

 그때 나는 성균관대학교 여학생회 부회장으로 시위를 주도했다는 죄목으로 1964년 6월 4일 서대문형무소 2사 2호실에 수감됐다가 아버지께서 뇌일혈로 별세하시자 대학교 총장님과 교수님들의 구명운동 덕택으로 풀려났다. 그 후 학교에서 정학을 당했고 요시찰 인물이 되어 공부도 취직도 할 수 없는 고난의 시간을 보냈다.

 

 1988년 4월 8일 제 13대 총선에 통일민주당 의정부 지구당 위원장으로 국회의원 후보로 입후보하여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그 해 광화문에 한국여성발전위원회 사무실을 개소하고 여성의 권위와 평등에 관한 여성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연구와 각종 세미나, 강연에 몰두하였다. 각계의 많은 여성과 교류하고 협력의 장을 쌓아갈 무렵 미국무성 초청으로 미국의 정계와 여성계를 한 달 간 시찰하는 기회가 주어졌다. 여성의 유리천장을 깨기 위해서는 남성보다 2배 이상의 노력을 경주해야 지위를 얻을 수 있고 인격체로서 설 수 있다는 현실을 직시했다. 여성의 지위향상을 위해서는 공공기관에 여성의 자리가 할당되어야 한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공공조직은 서열이 말해주기 대문에 지위를 가지지 않고서는 정책을 실현할 수가 없다.

 

 1993년부터 1998년까지 5년간 의료보험관리공단(현 국민건강보험공단) 상무이사로 재직하면서 전국의 227개 지역의료보험조합과 직장의료보험으로 나눠진 의료보험 체계를 현재와 같은 하나의 체계로 통합하는데 전초적인 역할을 해내었다.

 

 당시 통합의료보험 체계의 필요성은 알면서도 공단 내외부에서 어느 누구 하나 나서지 않았다. 당시 많은 지역조합으로 분산된 의료보험이 하나로 통합되면 국민의 편의가 증진되고 불필요한 업무를 줄이며 보험의 재정을 건전하게 만들 수 있다는 신념에서 학계와 사회단체 등 각계의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 고민하고 연구하여 기어이 통합을 이루어낸 것이다. 이를 위해서 보건복지부 전산망 추진위원으로 행안부와 행정기관 전산망을 설치하는 작업에도 열성을 기울이며 일산에 직영병원 건립본부장도 겸임하느라 하루같이 새벽 6시에 출근하면 밤 12시가 넘어야 집에 들어오기를 계속했다.

 

 그리고 한나라당 사회 문화 노동분과 정책자문위원으로 장애인 고용과 직업재활 등 취약계층의 사회복지정책, 여성정책, 노동정책에 대해서 꾸준히 연구했고 보다 나은 정책을 발견하기 위해 늦게나마 대학교를 39년 만에 차석으로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하여 사회복지학 석사학위도 취득했다. 내가 다양한 사회활동 및 연구를 통해 소외계층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모두가 행복한 사회에서 잘 살기를 바라는 소망 때문이다.

 

 나는 1989년 6월부터 1997년까지 10여 년 동안 6.3동지회 총무인 상임간사를 하면서 6.3운동의 실상을 기억에서 사라지기 전에 기록으로 남기고자 뜻있는 동지들과 불철주야 노력한 결과 1993년 2월 4일 6.3운동사 발간계획 및 기금 조성 문제를 확정했고 각 대학 1인씩의 편집위원을 선정하여 대학별 6.3학생운동의 실상을 집필하여 1994년 6.3학생운동 30주년에 '6.3학생운동사'를 간행하는 큰 영광을 얻게 되었다.

 

 6.3학생운동은 한일회담 자체를 반대하거나 한일 국교정상화를 반대한 국수주의적 운동이 아니었고, 굴욕적인 한일회담에 반대하고 일본의 팽창주의에 반대한 민족자존의 민족주의 운동이었다. 

 

 6.3학생운동은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민족의 정서와 국민의 의사를 무시하며 4.19정신을 유린한 군사정권에 맞서 싸운 최초의 반군사독재 민주주의 운동으로 그 운동의 맥은 문민정부 창출을 이루어냈다.

 

 생각해보면 그 해 6.3학생운동은 내 생애를 바꾼 기폭제였다.

 

 

 

- 홍사임, 고갯마루에 올라 p.4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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